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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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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양용찬

당시 나이 : 25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양용찬

당시 나이 : 25세

제주도를 끔찍이 사랑했던 양용찬 동지는 89년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에 가입하여 낮에는 타일공으로 일하면서 청년회 내의 '농민사랑' 모임의 구성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그 후 농민사랑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동지는 '서귀포지역 문제 대책위' 에 참가하여 서귀포 지역 개발 문제, UR과 제주도 개발 특별법, 농수산물 수입개방 및 지역 감귤문제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91년 11월 7일, 양용찬 동지는 '세계의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특별법 저지","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였다.

프로필
1966년 제주도 남제주군 출생
1982년 2월 서귀포 고등학교 졸업
1985년 3월 제주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입학
1987년 군입대로 휴학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자진 중퇴
1989년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 가입
1990년 UR반대와 제주도개발 특별법 반대투쟁
1991년 11월 7일 서귀포 나라사랑 청년회 옥상에서 "제주도 개발 특별법 저지"등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투신
제주도 서귀포 신례리에 안장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오원진

당시 나이 : 40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오원진

당시 나이 : 40세

오원진 동지는 충남대에 입학하여 민주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어 감옥생활을 하였으나, 출감한지 채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84년에 흩어져 생활하던 동지들을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충남민주화운동연합을 결성하였다. 정권의 숱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민청을 지켜나간 동지는 민중교회 야학,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가톨릭청년회, 기독청년회 등 지역 청년운동을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항상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였고, 운동적 시각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으며, 운동하는 친구들이 도식적이고 소아병적인 경직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던 동지를 뵤면서 많은 사람은 감동을 받았다 한다. 그러나 1992년 9월 11일 암과의 투병을 안타깝게 운명하고 말았다.

프로필
1952년 3월 18일 충북 청원군 출생
1973년 충남대학교 입학
1975년 유신헌법 철폐 시위 주도로 제적
1980년 유신정권 붕괴로 복교 충남대학교 학생회장 역임
유신잔당 퇴진, 노동 3권 보장 등 민주화 요구 시위로 구속, 투옥
1985년 충남민주화운동 청년연합 초대의장
1987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 공동의장
1992년 9월 11일 충남대 부속병원에서 암으로 투병 중 운명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오한섭

당시 나이 : 28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오한섭

당시 나이 : 28세

오한섭 동지는 81년 새마을 청소년 경진대회 낙농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축산기술이 뛰어났고, 잘 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81년 영농후계자 자금 200만원을 받아 한우를 길렀으나, 당시 전경환 새마을 운동본부에서 외국소와 쇠고기 수입을 하자, 소값이 폭락하게 되었고, 밀리는 사료값을 갚기 위해 계속 소를 팔이 급기야는 85년 11월에 송아지 14마리를 팔아 밀린 사료값 500만원을 갚자 5마리의 송아지밖에 남지 않았다. 오한섭 동지는 논밭 한뙤기 없는 처지에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농협 빚 420만원도 갚아야 하고 많은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동지는 영농 후계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다. 농민의 생산결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분개하여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음독하여 3일만에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은 살농정책으로 인한 농촌파탄에 대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프로필
1958년 충남 아산 출생
1975년 천안 농업고등학교 축산과 졸업
아산군 인주면 청년회장 영농후계자 회장 역임
1986년 3월 10일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여 음독
1986년 3월 13일 운명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덕인

당시 나이 : 28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덕인

당시 나이 : 28세

이덕인 동지는 인천시가 휴식공간 목적으로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95년 7월 3일부터 장애인 22명, 빈민 20명과 함께 노점을 시작했고, 이에 구청에서 수차례에 걸쳐 노점 철거를 지시하자 그들은 철탑망루를 설치하여 대항하였다. 11월 24일 드디어 경찰병력과 용역깡패 1,500여명이 포크레인으로 강제 철거를 시작하자 시장면담을 요구했으나 강제로 시청밖으로 끌려나왔고, 망루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덕인 동지는 25일 7시 30분경 망루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행방불명되었고, 아암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밧줄로 손이 앞으로 가지런히 묶여 있었고 양쪽 팔과 얼굴부위에 상처로 간주된 피멍이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4급 장애인이라는 힘겨운 신체 조건하에서도 노점생활로 기반을 꾸리고 이덕인 동지는 현정권과 인천시 당국의 대책없는 노점철거로 인해 살해된 것이다.

프로필
1967년 12월 전남 신안군 출생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농성중 실종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 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범영

당시 나이 : 39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범영

당시 나이 : 39세

이범영 동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위대한 사상가도, 뛰어난 경세가도, 불세출의 지략가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천재의 광휘가 번뜩이는 타고난 글쟁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건설하고, 의장을 지냈으며,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외 의장을 역임하는 등 개인의 안일과 욕망을 뒷전으로 밀쳐 놓고, 이 사회와 세계를 뒤바뀌고자 했던 활동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프로필
1955년 강원도 원성군 출생
서울고등학교 졸업
197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1976년 12월 유신반대 시위주도로 구속, 항소심에서 2년6개월 선고받음
1979년 7월 형집행 정지로 출감, '전국 병역대책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으로 활동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집행국장
1988년 민청련 의장
1990년 전국 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 의장
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의장
1994년 8월 12일 담도암으로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오순

당시 나이 : 68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오순

당시 나이 : 68세

1985년 경원대에 다니던 막내아들 송광영 동지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철폐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분신하여 운명한 뒤 이오순 동지는 서울 기독교병원에서 화마와 싸우면서도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 통일을 부르짖는 아들 광영과 조국의 어머니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여러 투쟁에서 '감동의 황색 가죽가방'으로 불리우며 백골단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동지는 1991년 유가협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회원 조직화에 앞장서다 강경대 동지 치사 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공판에 항의하다 법정소란 혐의로 1심에서 1년 6월동안 수배생활을 하였다. 94년 문익환 목사님의 서거로 충격을 받고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다 결국 심장병으로 운명하여 문익환 목사님과 아들이 묻힌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프로필
1926년 전남 광주 출생
1985년 막내 아들 송광영 동지 분신으로 운명
1989년 유가협 회원으로 활동
1991년 전국민주화 유가족 협의회(현 전국민족 민주유가족협의회) 부회장 역임
강경대 동지 치사경관 공판 도중 부당한 판결에 항의하다가 1년 6개월 수배생활
1993년 송광영 동지 묘역을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함
1994년 1월 2일 문익환목사 장례식에 참여하고 충격받음
1994년 1월 26일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원기

당시 나이 : 23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원기

당시 나이 : 23세

이원기 동지는 성남 은행 2동 13통에서 사글세방을 전전하다 가족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강제로 쫓겨나다시피 하여 오갈데 없는 막연한 상황에서 1987년 3월경 결국 시유지에서 군용 텐트를 치고 전기도 없이 거주하는 중에 성남 시청 철거반들의 악랄한 철거만행이 시작되어 철거반들의 온갖 협박과 철거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은행 2동을 중심으로 빈민협의회를 구성, 김광수 목사님을 구심점으로 하여 1989년 하대원 철거반대투쟁에 연대 참여하였다. 수차례 철거 위협을 받고 "이 지역이 철거를 당한다면 차라리 내 한목숨 버리겠다. 시장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말을 하면서 괴로워하던 이원기 동지는 이웃 주민 앞으로 남긴 유서에 처와 자식을 부탁한다는 내용과 13통 통장 앞으로는 어려운 주민들인 만큼 철거를 막아달라는 내용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프로필
1987년 성남 은행동 빈민협의회 결성
1989년 성남 하대원동 철거반대 투쟁참여
1990년 5월 17일 당국의 무책임한 철거를 막아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메어 자결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재식

당시 나이 : 37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재식

당시 나이 : 37세

이재식 동지는 고향에서 삶터를 찾아 거제로 들어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성실하게 살아갔다. 신문사 지국에서 일하면서 한편으로 부인과 힘을 합쳐 호떡을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 보려고 나선 이재식 동지의 노점활동을 사무소는 대책도 없이 단속, 철거만 했다. 1989년 10월 16일 신현읍 개발과장을 반장으로 한 노점단속반이 거제군 농촌지도소 앞 호떡 손수레를 끌고 갔다. 부인이 이에 항의하던 중 밀가루 반죽을 오토바이에 싣고 온 남편 이재식 동지가 통사정을 해도 듣지 않고 읍장은 뒤늦게야 나타나 콧방귀만 뀌며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자 12시 40분경 울분을 못 참은 동지는 그만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당겼다. 이를 본 직원들이 멍하니 보는 사이에 3도에 이르는 치명적인 화상을 입고 거제 기독병원, 마산 고려병원, 부산대병원 등을 찾아갔으나 모두 진료를 포기하여 영도의 해동병원에서 생사를 헤매다 운명하였다.

프로필
1952년 5월 충북 중원군 출생
1985년 '성흥사'에 입사, '노동조합 추진위원회' 를 구성하여 부위원장 역임
1987년 9월 한국의장 취업
1988년 5월 노동조합결성추진과 조합활동에 대한 감시와 해고위협으로 노동자 생활정리, 한겨레신문 거제지국 총무, 대우조선 노동자의 파업과 농성지원
1989년 6월 노점활동 시작
1989년 10월 16일 전국적인 노점단속에 항의하여 분신
1989년 12월 11일 57일간의 투병 끝에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정순

당시 나이 : 39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정순

당시 나이 : 39세

이정순 동지는 어려운 환경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가정살림과 동생들 학비를 뒷바라지 해주었다. 그 후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가정형편이 매우 힘들었고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1남 3녀를 뒷바라지하며 꿋꿋이 버텨나갔다. 평소에 공부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던 동지는 어려운 시련에서도 끊임없이 공부했다. 평소에 노트에 많은 글과 시를 썼는데 분신 뒤 동지의 방에서 그런 노트가 3권이나 나왔다고 한다. 그 뒤 이정순 동지는 성당에 열심히 다녔고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의 희생정신에 대해 깊이 감화받았던 듯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 경 강경대 동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 정문앞 철교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불덩어리가 되어 투신하였다.

프로필
1952년 3월 19일 전라남도 순천 출생
1964년 2월 순천 남국민학교 졸업
1991년 5월 18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철교위에서 분신 후 투신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태춘

당시 나이 : 27세

민주열사 (재야운동가)

이름 : 이태춘

당시 나이 : 27세

지는 1987년 6월 18일 부산 좌천동 육교 시위에서 전경들이 다연발탄과 직격탄을 쏜 뒤 육교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이날 저녁 좌천동 시위는 6월 항쟁 중 부산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었고, 발견 당시 상황은 행진 중 전면에 있던 경찰이 갑자기 다연발탄과 최류탄을 난사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밀집하여 있던 사람들이 정신없이 윗쪽으로 피하면서 흩어졌고, 사람들이 떠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등 극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시위대가 지나간 뒤, 시민 4명이 동지를 지나가는 승용차에 태워서 대연동 재희병원으로 후송했고 그 당시 동지는 눈을 갸냘프게 움직였으나,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옷에 하얀 최루가루가 뿌옇게 묻어 있었다고 한다. 뇌수술을 하였으나, 1987년 6월 24일 20시40분경 운명, 부검 후 1987년 6월 27일 10시 범일성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프로필
1960년 2월 7일 부산 출생
1986년 2월 동아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3월∼87년 3월 주식회사 화승 자재과 근무
1987년 3월 2일 태광고무(주) 무역부 입사
1987년 6월 18일 6월 민중항쟁의 시위 도중 부산시 좌천동 육교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
1987년 6월 24일 부산시 봉생병원에서 뇌수술하였으나 운명
양산 가톨릭 공원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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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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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 공간